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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주민센터우리동안내

홈페이지 담당
정수연 02-2148-5213

동명유래

가회동의 동명은 조선초기부터 있었던 북부 10방(坊)중의 하나인 가회방에서 유래된다.
가회동을 이룬 조선시대의 자연부락 중 홍현(紅峴)은 정독도서관의 남쪽에 있던 고개로 붉은 흙이 많아서 붉은 재(紅峴)라 하였으며, 동곡(東谷)은 가회동·재동(齋洞)·화동(花洞)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붉은 재의 동쪽이 되므로 동골이라 한 것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또한 맹현(孟峴)은 홍현의 북쪽에 있는 고개로 세종 때에 유명하던 고불 (古佛)맹사성(孟思誠)과 후손으로 숙종 때 황해(黃海)·충청감사(忠淸監司)를 지낸 맹만택(孟萬澤)이 살았으므로 맹감사고개 또는 맹동산이라 하였다. 『한경지략(漢京識略)』권2 각동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맹감사현(孟監司峴)은 북악산 아래 재동 접경에 있었는데 옛날 세종조의 정승이던 문정공(文貞公) 맹사성이 살던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러온 것이다. 맹사성은 정승 지위에 있으면서도 모든 일을 대체(大體)만으로 판단, 처리하고 사소한 일에는 관계하지 않았으며 공사(公事)가 끝나면 초라한 집으로 돌아와 장기인 피리를 불었다. 공사를 품의(稟議)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문을 열고 들라 하여서 일을 결재하는데 생활이 아주 간소해서 여름이면 뜰안 소나무 그늘 아래 앉고, 겨울이면 방안에 앉는데 부들자리를 좌우편에 깔았을 뿐 별다른 물건이 없었다. 사람이 돌아가면 문을 잠그기 때문에 공사를 품의하러 오는 사람이 동구(洞口)에 와서 피리 소리를 들으면 맹정승이 반드시 집에 있는 것을 알았다.

옛날 명관의 간결청렴하고도 풍류가 있는 일단의 생활을 여실히 말하여 주는 이야기라 하겠다.

현재의 가회동은 동으로 계동, 서쪽은 화동, 남쪽은 재동, 북쪽은 삼청동으로 둘러싸인 동으로 전통적인 한옥가옥들이 많아 서울 도심지 속에 비교적 조용한 주택지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dong/2014/open_content/08/05/02/01/0502010101.jsp